[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윙가르디움 퓨리오사!*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0102
05/18
내년 오스카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가 기술부문 후보 지명을 받는 데에 그친다면 나는 꽤 실망할 것이다. 반면 각본상 후보에 오른다면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분노의 도로>는 훌륭한 이야기다. 불필요한 인물도 없고 장면으로 인물을 빚는 법도 탁월하다. 대사의 양은 중요치 않다. 영화는 맥스(톰 하디)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세계가 무너지면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파괴됐다.” 상투적인 디스토피아 영화 오프닝처럼 들렸던 이 대사는, 인물이 하나씩 등장하면서 의미를 찾아나간다.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의 18륜 구동 워리그에 올라탄 여덟 인물은, 공동체의 실패가 어떻게 개인의 존엄과 인성 파괴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각자 이 전락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는지 드러낸다. 영화 홍보 문구는 “살아남기”를 전체의 테마로 강조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생존이 궁극적 가치라고 말하는 주요 인물은 맥스뿐이다. 퓨리오사가 들려주는 목표는 ‘구원’(redemption)이다. 복수도 희망도 아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속죄를 포함한다. 조지 밀러 감독은 퓨리오사의 과거사를 길게 논하지 않지만, 그녀는 여성을 가축 취급하는 남성 독재 체제의 지도층에 편입돼 살아왔다. 퓨리오사의 삭발과 의상, 기계의수 등은 여성의 표식을 지우고 있는데, 이는 남성 중심 사회의 권력을 나눠갖기 위해 택한 위장(camouflage)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과연 영화 초반 임모탄과 워보이들이 사령관 퓨리오사를 명예 남성으로 대한다. 요컨대 기득권층인 퓨리오사의 탈주 계획은 오히려 그녀의 생존에 해롭다. 그녀는 삶을 바로잡으려고 결단한 것이다. 병약한 워보이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곧 스러질 목숨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얼마나 의미에 목말랐냐면 몸에 생긴 종양에까지 이름을 붙여줄 정도다. 임모탄을 신격화한 눅스는 전장에서 산화함으로써 보스에게 인정받아 천국 발할라에 입성하길 열망한다. 그러나 퓨리오사 일행에 합류한 이후 그가 생각하는 위대한 생의 의미는 허위의식을 탈피해 내 옆의 타인을 살리려는 의지로 전환된다. 눅스는 모멸당하는 소모품에서 진짜 영웅으로 변모함으로써 극중에서 가장 격한 변화를 경험하는 캐릭터이며, 시타델 체제가 자원 독점 외에 어떤 이데올로기로 유지되고 있는지 관객에게 알리는, 서사에 긴요한 인물이다.
임모탄의 다섯 여자는 눅스와 달리 탈주 여정에 오르기 전부터 종속을 거부한다. 아직 젊은이들의 슬로건은 ‘희망’이다. 호의호식하는 씨받이, 성노예로 살기를 거부하고 인격을 지키며 살고자 한다. <분노의 도로>의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대목은 자칫하면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질 다섯 여자에게 퍼스낼리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서사 창작물의 성평등 지수를 가리는 벡딜 테스트가 있다. 극중 이름이 부여된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이고 그들이 남자 이외의 화제로 대화를 나누느냐가 판정 기준이다. <분노의 도로>는 벡딜 테스트를 훌쩍 뛰어넘는다. 만삭의 스플렌디드(로지 헌팅턴 휘틀리)는 비폭력주의자로 총을 장전하기도 싫어하지만 자기를 희생할 용기가 있다. 과단성 있는 토우스트(조이 크래비츠)는 행동력이 강하다. 케이퍼블(라일리 코프)은 눅스를 용서하고 변화시킨다. 프래자일(코트니 이튼)은 이름처럼 겁이 많지만 소리없이 성장하고, 역시 임신 중인 대그(애비 리)는 외유내강형으로 사막에서 만난 부발리니 할머니들과 제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바삐 도망치는 와중에도 풀어낸 정조대를 발로 차는 것도 그녀다. 영화를 두 번째 보는 동안 나는 맥스와 눅스의 공격에 여자들이 합심해 대항하는 장면에서 놀랐는데, 어지러운 액션 중에도 각자의 리액션에 성격이 반영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금씩 상이한 인물들의 동기와 필요는 추격전이 진행됨에 따라, 시타델로의 귀환과 혁명에 의해서만 공히 충족될 수 있음이 명백해진다. 결국 억압을 피해 ‘여기 아닌 다른 곳’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이 180도 기수를 돌려 역주행하는 사태가 빚어진다. 운동의 방향으로 치면 반전이지만 주제와 드라마의 전개로 보면 터보 모드의 직진인 셈이다. 이 내적인 교차가 강렬한 쾌감과 각성을 폭발시킨다. 혹자는 시타델로 가자는 제안을 맥스가 내놓았다는 점에서 여성 주체의 결단이 아니라고 지적하지만 기계적 해석으로 보인다. 맥스는 남성적 권위로서가 아니라 황무지의 생태를 잘 아는 떠돌이로서 현실적 대안을 낸 것이고 그의 아이디어는 일행 전원의 근거 있는 동의로 힘을 얻는다. 그리고 퓨리오사는 군인이자 리더로서 귀로의 전황과 시타델의 여론을 가늠해 최종 판단한다. <분노의 도로>는 종장까지 가속 페달을 밟아 피니시 라인을 뚫어버리는 이야기다. 우리는 가부장제로부터 도주한 여자들이 남성의 영토 밖 해방구(liminal space)로 탈출하는 순간 멈춰버린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퓨리오사 일행은 소금 사막에서 죽을지언정 이꼴저꼴 안보는 길을 버리고, 자기들을 착취해 축적한 자원과 인프라를 접수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왜 우리가 떠나야 하는가? 네가 가라, 사막.
05/19
우리에겐 액션 스펙터클과 서사적 재미를 물과 기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평이한 영화들에는 적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성립하지 않는다. 액션영화도 위대해지려면 동기와 행위, 결과를 잇는 논리와 윤리를 요한다. <분노의 도로>에 표명된 단호한 페미니즘도 액션영화로서의 비범함과 통한다. 조지 밀러 감독은 마초적인 기존 액션영화의 플롯을 혁신할 궁리를 하다가 여성 주체를 강화했다고 밝혔다. 한편 밀러는 액션 장르 경험이 없어 주저했던 편집기사 마거릿 식셀(감독의 부인이기도 하다)에게 <분노의 도로>의 커팅을 청하며 “남성 편집기사가 작업하면 결국 다른 액션영화와 비슷해지지 않겠냐”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물론 영화계에는 거장의 파트너로, 액션 블록버스터를 완성하는 손으로 정평난 여성 편집기사들이 이미 다수 존재한다. <분노의 도로>의 숨 막히는 액션 시퀀스에서 보여주는 독창적 뉘앙스가 편집기사의 성별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물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새삼스럽지만, 가장 훌륭한 스토리텔러는 근본적으로 페미니스트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현실 비율대로라면 인물의 절반이 상투형에 갇혀 활동 반경을 제약받는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재미있을 수 있을까? 여기 동의하지 않는다면 페미니즘을 뭔가 다른 비좁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05/21
다양한 해석을 보탤 수는 있다. 하지만 구태여 <분노의 도로>가 페미니스트 액션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평은 좀 의아하다. 상징, 메타포까지 갈 것도 없이 코앞에 제시된 팩트와 텍스트가 너무나 또렷하기에, 페미니즘영화임을 부정하는 근거보다 기어코 부정하는 의도가 더 궁금해진다. <분노의 도로>는 세 연령대의 여성 인물들이 피폐해진 세상과 자기 삶의 복원을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다. 나아가 남성 지배체제가 파괴한 세계에서 여성 리더십이 이끌어가는 대안적 시스템을 도모하는 결론을 갖고 있다. 심지어 성대결로 봐도 무방하다. 100% 남성 집단과 두 남성 조력자를 포함한 여자들의 결사가 영화 내내 전면 대결한다. 남아에 대한 임모탄의 배타적 집착은 그가 그냥 독재자가 아니라 철저한 성차별주의자임을 명시한다. 조지 밀러 감독도 다섯 여자를 한 남자에게서 구해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전사가 남성 캐릭터였다면, 그것은 본인이 하고자 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밝혀 의도를 분명히 했다. 제작과정에서도, 오늘날 세계 각국의 성적, 인격적 자유를 박탈당한 여성의 실태에 정통한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저자 이브 엔슬러를 초빙해 여배우들이 배역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만전을 기했다. 영화의 예술적 목표를 이루는 데에 이 과정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가 반드시 작품의 실체는 아니라는 반박이 가능하다. 그러나 <분노의 도로>의 실체는 조지 밀러의 구상을 서사 전개부터 시각적 디테일까지 정확히 형상화하고 있다. 이 영화의 또렷한 페미니스트 지향을 외면하는 반응은, 페미니즘 미학이 여성 캐릭터의 우월성을 무차별적으로 관철시키고 모든 사건 전개에서 여성이 이니셔티브를 쥐는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혹은 여성의 강화가 곧 남성의 약화라는 미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분노의 도로>의 여자들은 남자를 때려눕혀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권력에 의해 태아를 담은 용기나 성욕 해소 도구로 물화되고 대상화되기를 거부하기에 페미니스트다. 총알받이 눅스도 ‘피 주머니’ 맥스도 도구화된 인간으로서 같은 고통 아래 있고 여자들은 그들과 한차를 타고 싸운다. 신념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남자들의 구조를 기다리지 않을뿐더러 전투 중 남자들을 구해내는 그녀들은 자신의 힘과 품위를 믿는 페미니스트고, 그녀들을 온전히 존중하는 맥스와 눅스도 페미니스트다.
05/22
임모탄의 다섯 아내가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흠칫했다. 워리그 바닥에 숨어 있다가 사막 복판에 내린 아름다운 여자들은, 마치 디오르 향수 광고 속 샤를리즈 테론 같은 차림새로 몸을 씻어내린다. 혹시 <분노의 도로>도 대외적 주제와 이미지가 전하는 암묵적 메시지가 따로 노는 영화에 그치는 게 아닐까? 극중에서는 대상화되길 거부하는 여성 캐릭터가 관객에겐 눈요기로 소비되는 전례들을 따르게 될까? 그러나 맥스가 퓨리오사 일행을 처음 발견하는 이 장면을 카메라는 평평한 풀숏으로 잡아낸다. 마이클 베이 영화나 또 다른 자동차 액션 시리즈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그랬듯 여자들의 신체 일부를 따내 카메라로 훑지도, 줌인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곧장 주먹다짐과 다섯 여자의 성격묘사로 넘어간다. 스플렌디드와 네 친구는 영화에서 성적으로 철저히 대상화된 처지다. 양질의 ‘씨받이’로서 통제 관리된 그들의 외모와 옷차림은 캐릭터의 조건을 반영한다. 그러나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을 절대 극중 설정과 혼동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관음적 숏의 부재는 본인이 하려는 이야기와 그것을 그르칠 수 있는 실수를 잘 파악하고 있는 조지 밀러의 엄정한 연출 태도를 보여준다. <분노의 도로>가 여성의 몸 일부를 부각시킨 숏도 있다. 임신으로 부푼 스플렌디드의 배다. 그녀는 공격해오는 임모탄을 향해 달리는 트럭 문을 열고 친구들의 팔에 매달려 만삭의 배를 방패처럼 내민다. 여자를 자궁으로 환원하고 강제 임신으로 결박한 남자에게 거꾸로 태아가 든 배를 내밀며 “자, 네 새끼다. 쏘아봐”라고 일갈하는 이 숏은 통쾌하고 벅차다. 나아가서는 이 배우를 <트랜스포머3> 첫 장면에서 엉덩이부터 소개했던 마이클 베이 감독을 향해 치켜세운 그녀의 가운뎃손가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비단 카메라의 시선에 대한 숙고뿐만이 아니다. <분노의 도로>는 그토록 찬란한 순간을 스플렌디드에게 선사해 관객이 애착하게 만들어놓고도 그녀를 이야기의 볼모로 끝까지 붙들고 가지 않는다. 가장 페미닌하고 임신부로서 연약한 상태인 스플렌디드에게 우리가 연연하도록 만들면 이야기의 중심이 흐려진다고 믿는 것이다.
60대 이상 여인들로 구성된 부발리니족의 묘사도 마찬가지다. ‘초록 땅’에 대한 퓨리오사의 회상은 ‘대지의 여신’ 같은 어머니들을 기대하게 만들지만 정작 부발리니들은 척박한 환경에 연마된 전사의 모습이다. 대중문화가 각인한, 누드나 다름없는 가죽과 스판덱스를 입은 ‘여전사’ 이미지와는 상극이다. 그렇게 조우한 젊고 여린 여자들과 늙고 거친 여자들은 서로를 신기해하며 만져보다가 이내 무기와 신뢰를 나눠 갖는다. <매드맥스3: 썬더돔>에서 티나 터너가 부른 <다른 남자 영웅은 필요 없어>(We Don’t Need another Hero)가 들리는 듯하다. 워너브러더스는, 마블-디즈니가 블랙 위도우 장난감 제작에 우물쭈물하는 틈을 타서 퓨리오사와 부발리니의 액션 피겨를 서둘러 내놓을 필요가 있다. (다음에 계속)
(엄지척!)
리뷰가 너무 감동적이라 눈물까지 나오려고 한다. 그간 정리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맴돌던것들이 이 글로 다 정리가 되는 느낌 ㅠㅠ 이 영화에 대한 여러 반응 중 이해할 수 없는 두가지 반응이 있는데 그게 바로 1. 내용이 없는 액션영화다 2. 이게 무슨 페미니스트? 였다.
일단 이 영화는 방대한 서사를 담고 있는 영화이지 맥락 없이 액션만 해대는 영화가 아니다. 여러 주요인물들이 각각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이 각각의 이야기들은 논리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또한 어느 한장면도 허투루 사용하지않고 함축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거대한 추격전에만 집중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다시 말하면 그 추격전안에 영화가 만들어낸 세계를 응축해 담아내고 있단 말이다. 그리고 액션뿐인 영화가 아니라 액션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영화라고 하는게 맞다. 액션 시퀀스가 끊임 없이 나오지만 이 시퀀스들에 반복되는 이야기는 없으며, 이처럼 각각의 다른 이야기를 담고있는 액션 시퀀스들이 개연성을 이루며 서사를 만들어 가는것이다. 그저 의미 없이 주먹질만 하고 있는 영화가 아니라구요 ㅠㅠ 각 액션시퀀스들을 통해 이야기가 뻗어나가고 있는데 뭔 스토리가 없다 드립인지 ㅠㅠ 오히려 저 많은 이야기를 이토록 명료하면서 담백하게 담아냈다는게 감탄스러울 정도인데 ㅠㅠㅠ 영화의 내러티브라는게 대사와 구체적인 장면으로 다 설명을 해야만 완성되는게 아니어요..ㅠㅠ 이런게 영화이지요. 요즘 몇몇 영화들 쓸데없이 사족이 긴 경우가 많아서 싫었단 말이다 ㅋㅋ (개인적으로 놀란의 작품이 점점 기대가 안되는 이유 중 하나..사족은 길고 정작 이야기는 가볍다.)
그리고 두번째 페미니스트에 대한 반박..특히 진짜 어이없던게 맥스가 시타델로 돌아가자는 제의를 했으니 이 영화는 남성이 주체가 되는 영화이고 여성은 그저 수동적인 역할이었다는 주장..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보면 저런 개소리가 나오나 싶었다. 정말 심하게 말해 개소리; 영화 발로 봤나?;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은 가부장적 체제를 바탕으로 여성을 도구화하고 있는 남성 독재자에 대한 저항이며, 이 저항이 누구에 의해 시작이 되었으며 전개가 됐는지 생각해보면 여성이 수동적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올 수가 없는데 말이다. 맥스라는 인물자체가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목표로 쫓기듯 살아가다 주체적인 여성들을 만나 변화를 겪게되는 인물인데다, 맥스의 시타델로 돌아가자는 제안은 이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었던가? 이건 진짜 영화에서 너무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부분인데..못알아 먹는건 너무하지 싶다. 이전 장면에서 퓨리오사에게 맥스가 던진 냉소적인 멘트가 괜히 나온게 아니여..아무튼 맥스의 제안은 그야말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간으로서 '제안'을 했을뿐이고 결국 그에 동의하고 따른건 여성들의 몫이었건만...어떻게 저걸두고 수동적이다 드립을 할 수 있는지; 사고회로가 왜그렇게 편협한지 -_- 여성이 모든걸 쟁취해야 페미니즘이 완성되는거라 생각하는건가? ^_ㅠ 페미니즘 사전적 의미부터라도 좀 찾아봤음 좋겠다 ^_ㅠ (남성우월주의에 찌든 애들이 평등 같은건 모르고 반대편의 우월주의로 멋대로 해석하는거 같다) 아무튼 이 영화는 가부장 사회가 만든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대해 철저하게 반기를 드는 영화가 맞다. 그런의미에서 스플렌디드가 임모탄에게 뱃속의 아이로 위협하는 장면은 멋있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측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스플렌디드였다) 더 흥미로운건 여성과 공존하는 방식에 있어 맥스와 임모탄라는 대비되는 캐릭터를 구축함으로써 남성의 시각에서 다룬 페미니즘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자손 번식을 위한 도구로 삼지 않으며,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쓸모있게 사용하는 것 -,.-ㅋㅋㅋ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가 아니다 등신들아.. 동등! 동등이라고! 맥스와 퓨리오사는 동등했다고! 감히 여자가 명령을 내리느니 하며 지랄하는 병신들이나 맥스가 주체가 되었으니 여성이 수동적이었다는 바보들이나...;
사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굉장히 부각이 되고 있어서 그렇지 페미니즘 이전에 휴머니즘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자유를 갈망하고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영화이며, 그에 대해 영화가 내린 결론도 참 희망적이고 따뜻하기 그지 없다.
<양질의 ‘씨받이’로서 통제 관리된 그들의 외모와 옷차림은 캐릭터의 조건을 반영한다. 그러나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을 절대 극중 설정과 혼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부분을 읽다 보니 얼마전 임필성이 조지 감독이 눈요기하려고 이쁜애들 불러다 브리더 설정 만들었다는 식으로 농담인지 뭔지 모를 개소리를 했던게 생각이 났다...하긴 임필성이 어떻게 갓조지의 깊이를 이해하겠니..영화를 볼 줄 보르니 영화를 못만들지;